성경에서 말하는 침례
먼저 교계에서 말하는 침례에 대해 생각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 주장들 중에는 양극단이 있고 몇 가지 견해들이 있으며 과거 역사를 통해 이 침례문제로 교파들이 새로 생겨나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택했던 사실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 몇가지 교리상의 주장들을 살펴봅니다.
1) 침례 무용론자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믿고 거듭난 사람들로서 침례를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에 의해 거듭났으면 성령침례를 받은 것이며 물침례란 성령에 의해 받은 침례의 사실을 형식적으로 공표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그 형식은 중요하지 않거니와 성령의 인도하심에 치중해야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데에 치중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침례받았든 세례받았든 안받았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주의입니다.
원래는 거듭난 사람들 중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아예 거듭난 경험이 없는 교회 마당 밟으러 다니는 사람들중에도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퀘이커 교도들은 이런 경향이 있으며 과거 19세기에 불링거주의자들도 그러했습니다.
2) 침례 구원론자
이들은 침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합니다. 그 근거로 마가복음 16:16, 사도행전2:38을 듭니다.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막16:16 (믿고 침례 받기 전에는 구원이 없음)
“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행2:38 (침례를 받아야 죄사함을 얻는다 그리고 성령도 선물로 받는다)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거듭난 것이 아니니까 당연히 구원얻은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또 이들이 종종 인용하는 대목은 요한3장5절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인용합니다. 즉 거듭날 때는 물침례가 필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말씀하시는 물은 H2O 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됩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강력한 구절들 중에는 행 22장 16절을 들수 있습니다. 침례를 받아야 죄가 씻어진다는 말압니다.
그런데 믿고 침례받는 자는 구원얻지만 믿었는데도 침례는 못받은 사람은 구원을 못받는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십자가상의 한 강도가 그 예입니다. 또한 행 10장 44- 이하의 코르넬리오의 경우도 이러한 침례구원론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3) 침례 중생주의
이것은 앞서의 침례구원론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믿어집니다. 이것은 침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가 아니라, 침례를 받으면 거듭난 것이다, 즉 어린이들에게도 침례를 베풀면 어린이들이 거듭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부모의 보증하에 어린이들이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거나 그 어린이의 이마에 몇 방울의 물이 떨어지면 그 어린이는 거듭난 것이며 성령은 나중에 차츰 임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침례중생주의인데 로마 카톨릭 성공회 그리스도의 교회등 수많은 교단들이 이에 속한다고 믿어집니다.
4) 침례 대체 세례론자
침례를 꼭 말 그대로 지켜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로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중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침례도 타당하고 세례도 타당하다는 사람들과 침례를 주장하는 자들은 침례주의자들로서 이단들이며 세례가 성경적이라는 주장자들입니다. 본질은 세례로 침례를 대체할수 있다는 주장들이며 차이는 세례를 주장하는 강도에 강약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성경적 근거는 히브리서 9:10과 10:22, 민수기 8장7절과 19장9-10, 19을 근거로 침례가 아닌 세례도 무방하다 주장합니다. 또 신약에서도 막7:4, 룩11:38에서 밥티조가 씻는데 쓰였음을 근거로 세웁니다. 이들은 성경대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면 요단강에 가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이들은 요단강에서 물한병을 담아왔다는 예를 듭니다.
장로교와 감리교 성결교가 세례로 침례를 대체할 수 있다는 신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파내에서 목사가 침례받았다면 출교되는 사례가 있습니다. 미국의 로스엔젤레스 부근의 한 장로교 목사가 성경을 읽어본 결과 침례가 맞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침례교를 찾아가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장로교 노회는 그를 파면시켰습니다.
5) 성경에서 말하는 침례
우선 침례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요한의 침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회개의 표시로서의 침례였으며 예수님의 때까지였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6장은 그 의미를 설명합니다.
로마서 6:3,4 또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께로 침례받은 우리는 누구든지 그분의 죽으심 속으로 침례받았다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침례를 통하여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음 속으로 장례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자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신 것 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하도록 하려함이라.
즉 침례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음을 공표하는 예식행위입니다.
그 말씀은 갈라디아서 2:20과 일치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성경에서 말하는 침례는 우선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물과(말씀) 성령으로 거듭난 후 그 믿음의 표시로 침례를 받아 확인하는 것입니다. 침례는 구원 받기 위한 조건이나 선결 요건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인간의 어떤 행위와도 상관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성경 전체의 취지에 어긋납니다. 엡2:8-9
8 왜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로 너희가 구원을 얻었음이며, 또한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또한 로마서 4장4-16 절 또한 이 말씀을 뒷받침합니다. 십자가 상의 강도가 구원을 얻은 것은 그가 침례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침례는 이미 믿어서 구원얻은 사람이 그 믿음을 확인 공표하는 것입니다.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 믿음이 날마다 향상됩니다. 왜냐하면 침례가 모든 순종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 행 2:38
앞서의 번역은 개역한글입니다. 이번 것은 개역개정입니다. 왜냐하면 개역한글의 번역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정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원문은 개역개정이 옳습니다.
즉 회개하여(거듭남의 실체) 침례 받고 나면 성령께서 선물들로 여러가지 은사들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6) 세례로 침례를 대체할 수 있는가?
세례의 형식과 행동과정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의 말뜻은 씻는다는 말입니다. 과연 세례로 씻는 예식을 행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씻는 것이 아니라, 물을 이마에 떨어뜨리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실제로는 세례가 아니라 적수례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장사되었음을 표시하고 가르치며 기억하게 하는가? 저는 아니라고 단호히 말합니다.
세례로는 로마서 6장이 말하는 바를 체험시키지도 않으며, 성경에서 말한 밥티조의 뜻과는 다른 행동인 것입니다. 밥티조가 앞서 두 차례 언급된 경우처럼 씻는다는 뜻으로는 쓰였습니다.
세례가 과연 씻는 행동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저도 세례를 고등학교 시절에 받아보았습니다. 그때 물 몇방울을 목사가 떨어뜨려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저를 씻어준 것이 아니라, 제게 물 몇방을을 떨어뜨려 주었을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세례가 아니라 적례( 滴禮)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간이 씻어졌다는 것을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못합니다. 그것은 성경에 있지도 않은 방법이며 이 세상 이방종교에서 들어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 그분과의 연합을 생각나게 하지도 않으며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성경에서의 밥티조
뿐만아니라 성경에서 밥티조를 말할 때는 항상 침수 예식을 말해왔습니다. 요한은 살렘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그 이유는 거기에 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요한 3:23은 말합니다. 단순히 세례를 베풀었다면 물이 많아야 할 필요가 전혀없습니다. 그러므로 빌립은 사도행전 8장에서 물속으로 내려갔습니다. “
38 그가 병거가 서도록 명하고, 필립과 내시가 물속으로 둘이서 내려가, 저가 그를 침례하니라. 39 그러나 그들이 물속으로부터 올라왔을 때에, 주의 영이 필립을 취하여 가시니”
예수님께서도 요한에게 침례 받으시고 물로부터 올라오셨습니다.(마 3:16)
내려갔기 때문에, 물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올라오신 것입니다.
7) 마가, 누가, 히브리서와 민수기 등은 씻는 예식을 말하지 않는가?
마가복음 7장4절과 누가복음 11:38에서 씻는다는 뜻으로 밥티조가 쓰인 것은 원래는 그 씻는 것이 잠겨씻는 것을 의미하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침례나 세례와 관련하여 씻는다고 쓰인것은 아닙니다. 그 단어는 히브리어의 라하츠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쓴 것으로 봅니다.
히브리서 9:10에 쓰인 단어도 밥티조인데 그 번역은 한글 개역은 ”여러가지 씻는 것”으로 하였습니다만 역시 잠겨 씻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침수에 의한 목욕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세례주의자들이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히브리서 9장13절에 있습니다. “ 암송아지의 잿물을 뿌려서 정결케되었다”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죄의 사람의 상징인 암소가 진영밖에서 불태워져서 재로 두었다가 수시로 문둥병자나 죄인들이 그 잿물로 씻음을 입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침례라기 보다는 십자가 사실의 상징으로서 죄인이 그 잿물의 뿌림을 받아서 정결함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그 뒤로 그 잿물의 뿌림을 받은 사람은 잠겨서 씻음을 받았습니다.( 민수기 19:19) 그렇지 않으면 잿물 투성이였으므로 진에 들어올 수도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10장22절에 쓰인 씻음은 루오동사이며 이것은 예수님께서 요한 13:10에 이미 목욕한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하실 때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10:22절도 목욕 또는 잠겨씻기로 번역됨이 옳습니다. 세례를 주장할 수 있는 가장 근접한 예는 민수기 19:19절과 민수기 8장7절에서 속죄의 물로 뿌리라는 말씀을 들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물은 맑은 물이 아니라 암소를 태운 잿물이며 그것은 십자가의 사실을 의미합니다. 우리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영밖에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구약의 사람들은 잠겨서 씻었습니다(라하츠) 그것이 침례였습니다.(믹베에서의 씻음).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뜻하였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교회의 상징이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위에 떠다녔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침례 대신 물 몇방울을 떨어뜨려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선언한다는 말씀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8) 세례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고대 이집트에서 성수를 뿌리는 대목은 여러가지 그림에서 나타납니다. 교황이 들고 다니는 앵크 십자가 (위에 둥그런 모양의 고리가 달린 십자가) 역시 이집트의 태양신 제사장들이 들고 다니는 그림들로 많이 나타납니다. 그들이 물을 뿌렸습니다. 성수라하여 뿌렸던 것입니다. 세례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안데스 산맥에서 농부들이 일나갈 때 지게에 물을 뿌리는 행위, 한국의 삼신 할머니가 물뿌리고 무당들이 고수례를 하는 행위등은 모두 같은 체계입니다. 세례로 침례를 대체할수 있다고 주장하는 장로 교단에서 침례받은 목사는 제명처분 해버리는 현상은 무엇을 말할까요? 세례가 침례의 친구가 아니라 세례는 침례의 적이라는 표시 아니겠습니까?
9) 유아 세례는 성경적인가?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 베푸는 예식입니다. 어린이에게 유아세례를 베푸는 자들이 주장하기를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의 나아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룩18장15-17) 근거로 대기도 하며 사도행전 16:33절의 빌립보 간수가 그의 온 가족과 함께 침례받았음을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
어린이에게 침례를 베푸는 행위가 구원을 가져오지도 않거니와 믿음의 고백 이후에 베푸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빌립보 간수의 온 가족이 침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 가족들 중에 어린이들이 있었는지, 시부모와 노인들이 있었는지, 아니면 장성한 아이들이 있었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근거로 유아세례를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행 16장 32절에는 온가족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하고 34절에는 온가족이 믿었다고 나옵니다. 갓난아이에게 복음을 전해서 믿게 할 수도 없거니와 온가족이 믿었다고 할 때 갓난아이들이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간수의 집에는 유아들이 없었다고 확실하게 결론 내릴 수 있으며 그 구절은 유아침례를 뒷받침하는 구절이 결코 되지 않습니다!
칼빈이 유아세례가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유아세례를 반대했던 사람들을 핍박했던 사건들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갓난 아이들은 믿음을 고백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고백이 없는 아이들을 침례 베푸는 행위는 불신자들을 교회안으로 대량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사탄의 고등 전술입니다. 이 고등 전술에 의하여 수십억의 불신자들이 기독교 안으로 들어와서 기독교 이름을 갖고 기독교인 행세를 하면서 진정한 기독교인들을 핍박해온 것을 2천년간의 교회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10) 성령침례로 충분하지 않은가?
침례 무용론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며 형식주의를 배제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매우 주의하며 경계해야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퀘이커 교도입니다. 과거에 불링거주의도 같은 체제였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매우 잘 설명합니다. 한국의 구원파들 중에도 이러한 예식을 경시하는 모임들이 종종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에게 복잡한 것들을 행하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그분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매우 간단한 두가지 예식을 남겨두셨습니다. 그것들이 침례와 성만찬입니다. 그 둘은 성령침례나 성령침례를 받은 이후 신앙생활을 충실히 해나가는데에 있어서나 많은 도움을 주는 가시적 행사입니다. 즉 침례를 받음으로서 성령의 침례나 성령의 역사를 감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성령의 일하심을 크게 촉진하는 것이며 성령께서 일하시도록 순종하는 자세의 시작인 것입니다.
성만찬 또한 매주일 시행하였음이 성경에 드러납니다. (행20:7, 고전 11:25-26) 그 성만찬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으셨음을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고 고전 11장26은 말합니다. 따라서 성만찬은 주님의 죽으셨음을 기억하게 할 뿐만아니라 전도행위이며, 믿는 성도들과의 교제행위이고 영적 성장의 중요한 틀입니다. 그러므로 침례나 성만찬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자들은 영적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그들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거듭났으면 침례 안받았어도 천국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다른 신실한 성도들은 침례받았는데 자기만 세례받았다고 변명할 때 차마 그 변명의 말이 나오겠습니까? 침례 안받고 대신 영적으로 훌륭한 일 많이 했다고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로 그분 앞에 무릎꿇게 하는 진리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가며 침례를 지켰던 이유입니다.
11) 침례의 방법과 실행
침례는 받는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확실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단지 역사적 사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으며 나 자신의 모든 극심한 죄악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시고 못박히시고 매달리시사 피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죄값을 지불하실 때 나를 위하여 참으시고 죽으신 것이며 하나님은 그것을 근거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 사실을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영원히 변함없는 것으로서 성령께서 마음속에 새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물과 성령으로 이미 거듭난 사람에게 베풀어집니다. 그것은 목사나 신부나 어느 성직자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 얻고 침례 받은 사람이면 침례를 베풀수 있습니다. 저도 소위 성직자는 아니지만 종종 침례를 실행했습니다. 성직자만 할수 있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성경에서 찾아볼수가 없습니다.
침례를 침례탕을 만들어놓고 행하는 교회들이 침례교회들 중에는 많습니다. 형제모임들이나 성경 침례회, 일부 성서침례교회, 갈보리 침례교회등은 야외에서 주로 침례를 실행합니다. 만일 물을 통에 떠놓고 침례 받을 수 있었다면 예수께서 요단강까지 가실 필요가 있었겠는가?하는 주장입니다.
가두어놓은 물은 죽은 물이므로 흐르는 물이나 자연의 물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자연의 물에서 행하는 것이 옳지만 때에 따라서는 침례탕을 이용하는 것은 성경에서 많이 벗어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최근에 미국 남침례회 쪽에서 교회 안에 침례탕에서 침례를 실행하다가 마이크에 전류가 흘러서 침례하던 목사가 감전되어 죽은 사고가 2005년10월 말에 있었습니다. 그때 어느 침례교 신자는 자기네 교회에서는 반드시 야외에서 자연의 물로 침례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산의 개울에서 침례 받았고 제 아내는 임진강에서 받았습니다. 아마 자연의 깨끗한 물에서 실행하는 것이 더 좋을 것으로 봅니다.
이런 문제는 크고 중요한 것이 아니며, 일반교회의 판단에 맡길 수 있습니다.
12) 세례만 받고 침례는 받지 않았는데요.
먼저 그러한 기독교인들은 우선적으로 자신이 거듭났는지 여부를 분별해보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 안에 성령님께서 인도하시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응답하심을 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먼저 시험해보아야 합니다(고후 13장 5절) 그런 다음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에 의하여 자신의 모든 죄가 사해졌으며 자아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이제는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사신다는 고백이 참으로 자기 것이 되고 자기 진리가 되어 있는지를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아침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모든 죄가 사해졌다고 믿는다고 하면서 저녁에는 자신의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한다면 그는 모든 죄가 사해진 것을 믿지 않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십자가 진리가 진정으로 자기 것으로 온전히 된 다음에 침례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세례는 위조지폐와 같습니다. 그 위조 지폐 1억달러는 진정한 지폐 1백만 달러의 가치라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사처벌 받고 그 지폐는 쓸모없는 휴지로 불태워질 것입니다. 침례만이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예식이며 세례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위조지폐입니다!
이런 경우 성경적 침례를 실행하는 모임을 찾아가 구원간증을 하고 침례를 받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결코 후회함이 없을 것입니다!
침례는 소위 목사나 천주교 신부나 사제들 혹은 전도사 등 어느 특정 계급만이 베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필립은 집사로서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또한 마태 28장 19절의 명령은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명령이며 그것에는 침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침례에 관한 교훈과 말씀 진리 등을 온전히 알고 제사장들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로서(벧전 2:5-9, 계 1:6, 5:10) 주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가르칠 수 있는 형제는 침례를 베풀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칼빈은 성직자제도를 주장한 사람이므로 목사나 안수받은 사람만 베풀수 있다고 말하였는데 성경 어디에도 그런 구절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나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침례를 맡긴 것으로 보입니다. (요 4:1-2, 고전 1장14-17)
그러나 유아세례는 수십억의 불신자들을 교회안으로 끌어들여 교회를 안믿는 자들의 소굴로 만들고, 세상으로 만들어 버려 무력화시키기 위한 사탄의 술책이며, 세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성도들이 상기하거나 기억하게 가르치지 아니함으로서 성도들을 믿음없는 사람들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침례란 분명히 믿는 자의 완전침수에 의한 예식만을 의미하며 그것은 침례받는 자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선포하는 공개 의식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그분과 함께 장례치루어 매장되었으며 새로운 영으로 그분의 부활하심과 함께 거듭났음을 선포하는 믿음의 공식 선포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13. 2. 10 하토브